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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유래

화서2동 연혁 1

1796
화성 신도시 건설 후 팔달산 주변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구분, 북부에 속함. 북부 14개동 중 『서둔동촌』『고양동』『화산동』일대
1914.04.01
『화산동』,『동촌』,『고양동』을 합하여『동리』라 하여 화성군 일형면에 편입
1931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
1936.10.01
조선총독부령 제94호에 의거 의왕면과 일형면 일왕면에 통합 수원군 일왕면 일부의 동리가 수원읍에 편입『화서정』으로 변경
1949.08.15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화서정』이 『화서동』으로 변경
1963.01.01
동 통합에 의거 고등동과 함께 고화동에 편입
1978.11.07
수원시조례 제838호에 의거 고등동과 화서동으로 분동
1985.12.02
수원시조례 제1297호에 의거 화서1동과 화서2동으로 분동(13개통)
1987.09.01
수원시조례 제1398호에 의거 통반 조정(14개통)
1989.12.23
수원시조례 제1611호에 의거 통반 조정(16개통)
1992.08.01
수원시조례 제1297호에 의거 영화동일부가 화서동으로 화서동 일부가 정자동으로 편입
1997.10.27
수원시조례 제2102호에 의거 통반 조정(24개통)
1998.01.12
수원시조례 제2117호에 의거 통반 조정(27개통)
1999.10.01
수원시조례 제2214호에 의거 통반 조정(29개통 144개반)
2001.04.27
수원시조례 제2306호에 의거 명칭 및 관할구역 변경 정자1동 정자2지구 일부가 화서2동으로 관할구역 변경 및 통반 조정(32개통 159개반)
2001.11.15
수원시조례 제2330호에 의거 통반 조정(41개통 207개반)
2002.09.25
수원시조례 제2375호에 의거 통반 조정(43개통 214개반)
2003.11.24
수원시조례 제2440 및 수원시조례 제2456호에 의거 장안구에서 팔달구로 행정구역 변경
2008.12.29
화서동 277-2번지에서 현재 청사로 이전

화서2동 연혁 2

화서2동에는 꽃뫼 제사 유적지가 있고 바로 옆인 서둔동에 여기산 선사 유적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2,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화성 축성 이전의 숙지산 근처의 지명이 '공석면(空石面)'으로 나온다.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는데, 이때 북부에 속하였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에 북부 14개 동 중 '서둔동촌 (西屯東村)', '고양동(高陽洞)', '화산동(花山洞)' 등의 마을 이름이 보이는데 이 곳이 지금의 화서동 지역이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화산동, 동촌, 고양동을 합하여 '동리(東里)'라 하여 일형면(日荊面)에 소속되었다. 1931년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6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령 제 94호에 의하여 의왕면(儀旺面)과 함께 일형면은 일왕면(日旺面)에 통합되는 동시에, 수원군 일왕면 일부의 동리가 수원읍에 편입되어 '화서정(華西町)'이라는 일본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이 지역은 화서동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 동 통합에 의하여 고등동과 함께 고화동 관할이 되었다가, 1978년 11월 7일자 수원시 조례 제838호에 의하여, 다시 고등동과 화서동으로 분리되었다. 1992년 8월 11일에는 수원시 조례 제1816호에 의하여, 영화동 일부가 화서동으로, 화서동 일부가 정자동으로 편입되었다.

1997년 12월 31일 현재 화서1동의 면적은 0.79㎢ 이며, 화서2동의 면적은 1.80㎢이다. '화서(華西)'라는 동 이름은 화성의 서쪽문인 '화서문'에서 따온 명칭이다.

화서2동 지명유래

숙지산 (熟知山)

영복여자 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산으로, 화서동 산 34번지와 37번지 일대 에 있다. 원래는 '죽지산(竹枝山)'이라 했으나, 소리내어 표현해 보면 '죽는다'는 뜻이 연상되어 '숙지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는 달리 정조가 팔달산에 올라서 이 산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산이니 숙지산이라고 부르라.'고 한데서, '숙지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도 전해진다.

서호저수지 (西湖貯水池), 축만제 (祝萬堤), 서호 (西湖)

서둔동과 화서동에 걸쳐 있는 저수지이다. 근처에 농업 진흥청이 있다. 1799년(정조 23)에 정조가 내탕금 3만냥을 들여 축만제둔(祝萬堤屯)의 관개 시설로 만들었다.『화성지』,『수원부읍지』등을 보면, "축만제는 수원부 치소로부터 서 5리 북부에 있다. 정조 기미(己未)에 축조되었다. 감관 1인, 감고 1인, 길이 1,246척, 넓이 720척, 높이 8척, 두께 7척 5촌, 깊이 7척, 수문 2곳, 몽리답 232섬지기"라고 나와 있어, 그 규모가 화성 주변의 저수지 중에서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축만제'라는 이름은 '천년 만년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저수지는 '서호' 또는 '서호 저수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화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수지 서쪽으로 여기산 공원과 접해 있어 산과 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일월 공원, 정자 공원 동쪽으로는 팔달 공원, 숙지 공원 서쪽으로는 구운 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저수지는 2011년 준공된 서호생태수자원센터의 하수처리시설 운영으로 저수지 수질이 크게 향상되어 다양한 수중생물과 철새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서호생태공원 및 서호천 산책로 조성 등으로 화서2동 주민은 물론 수원시민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서호천 (西湖川)

황구지천의 상류부에 위치한 수원의 4대 하천 중의 하나이다. 수원시 북쪽 파장동의 파장동산(367m)에서 발원하여 웃파장천, 이목천, 송죽천, 매산천 등이 유입되어, 장지동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는 연장 11.52km의 준용하천이다.

서호천의 상류와 중류에는 파장 저수지, 서호 저수지가 있고, 영화천 상류에는 일왕 저수지가 있다. 서호천 유역은 권선구, 장안구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동서쪽으로 횡단하는 수인 철도의 남쪽은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북쪽은 대부분 산지, 주거지, 시가지로 개발되어 있다.

서호천이라는 이름은 서호 저수지에서 따온 것이라 추정된다. 즉 파장동산에서 발원한 후 남하하여 2.5km 지점인 이목동에서 좌측으로 이목천이 유입되고, 정자동 지점에서 영화천이 합류하여 서호로 유입되었다가, 다시 서호에서 남하해서 황구지천과 합류하는 까닭에 서호천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꽃뫼길

화산 지하도에서 천천 아파트에 이르는 총연장 880m에 도로 폭은 25m이다. 옛 꽃뫼 마을 앞을 통과하는 도로이므로 마을명을 취해 '꽃뫼길'이라고 칭하였다.

고양(高陽)골

고양골은 화서2동의 본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현재 화서2동 1통 지역이다. 동래 정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며, 마을의 동쪽 뒤로는 영복 여고 뒤편 숙지산과 연결되어 있는 채석장 산이 서 있다. 현재는 도로 개설, 주택 신축 등으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꽃뫼·꼴미·꼴뫼

화서2동 391번지 일대에 있다. 화서 전철역에서 서울 쪽으로 떠나면 바로 왼쪽에 아파트 숲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 작은 언덕같은 산이 하나 오똑 솟아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산이 꽃뫼이며, 한자로 화산(花山) 또는 화산(華山)이라고 쓴다. 주민들에 따라서는 꼴미, 꽃미, 꼴뫼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뫼는 두 언덕(작은 봉우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로쪽의 큰 것을 '큰봉재', 서쪽의 작은 것을 '작은봉재'라고 불렀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30여 호가 자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개발 사업으로 인해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주민들은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꽃뫼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아주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우며 품행이 단정한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병든 홀아버지와 사느라 혼기가 찼어도 시집을 가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아가씨는 자기집 머슴에게 불가항력으로 몸을 유린 당하고 말았다. 머슴은 아가씨와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라도 살자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병든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처녀는 죽음으로 오욕을 씻고자 했다. 그날 밤 집뒤의 산에 올라가 애처로이 소리죽여 운 뒤 나무에 목을 매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죽은 처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은 그 곳에 시신을 정성껏 묻어주었는데 그 후 그 곳에서는 꽃나무가 자라고 해마다 봄이 오면 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효심과 고운 마음씨가 꽃으로 환생해 해마다 피어나는 것이라고 여겨 그 다음부터 이 산을 꽃이 피어있는 산, 꽃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원시와 수원 대학교가 지난 97년 이 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 곳이 삼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잘 알수 없지만, 이 마을에서는 매년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꽃뫼에서 모든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제(洞祭)를 올리기도 했다.

꽃뫼에서 동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인데 특히 마을을 지나는 꽃뫼앞 철로에서 기차 사고를 당해 죽어나가는 사람이 생기고 처녀 귀신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제는 이 마을이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로 변화하면서 지난 1996년 철거민들의 주동으로 지낸 후 명맥이 끊어졌다.

꽃뫼의 지명에 대한 다른 견해는, 한자로 화산(花山)이라고 쓰게 된 연유에 대한 것이다. 이 곳에는 경주 김씨가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1997년 6월 철거 전까지 이 곳에 살던 주민 김희영 씨에 따르면 그의 9대 선조인 김상연(金相淵, 또는 相衍 : 1677~1732)이 여기산 기슭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도 그 호를 파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연은 조선 시대 숙종과 경종 때의 사람으로 경기좌방어사, 가선대부 부사원종공신 등을 지낸 무관으로서 호가 화산(花山)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도 화산에 묻혔다가 최근에 발굴되어 화장되었다. 따라서 경주 김씨 후손들에 따르면 처녀와 관련된 꽃뫼의 전설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위에 밝힌 두 가지 설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 지명에서는 땅 한쪽이 삐죽하게 튀어나간 곳을 '고지', '곶', '구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황해도 서해안의 '장산곶'이나 서울 성동구의 '살곶이' 같은 땅 이름이 있다. 수원에도 '황구지'라는 지명이 보인다. 곶의 안쪽이면 곶안(고잔), 바깥쪽이면 곶밖(꽃밭)과 같은 땅 이름이 나온다. 한국 땅 이름 학회 회장인 배우리 씨의 『지명유래의 조사방법』이란 책에 따르면 곶+안 = 곶안 > 고잔으로 변화한 땅 이름은 서해안 일대에 무척 많다는 것이다.

  • 고 잔 (高棧) : 인천시 남구 고잔동
  • 고 잔 (高棧) :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
  • 고잣말 (高尺) :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고척리 '곶의 바깥쪽'이란 뜻의 '곶밧'은 경음화하여 '꽃밭'으로도 옮겨 갔다. 그리고 이것이 의역되어 한자식 지명인 '화전(花田)'이 되었다.
  • 꽃 밭 (花田) :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 꽃 바 테 :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화전

이와 같이 생각할 때 화서동의 꽃뫼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땅 한 쪽이 삐죽하게 튀어나온 산', 즉 '곶+뫼 = 곶뫼 > 꽃뫼(花山 또는 華山)'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꽃뫼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평지에 돌출되어 동쪽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는 산세야 말로 '곶'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미륵불·약사 부처·마애불

미륵당은 화서2동 3통 271번지로 올라가는 골짜기 초입에 위치해 있다. 원래 화서동에는 3기의 마애불이 있어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 3기 중에 1기는 화서1동 동말의 말물상에, 1기는 고등동 어디쯤에(정확한 위치는 모름), 1기는 고양골 뒷 동산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

고양골의 부처는 원래 화양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학교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옛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을 보아서는 안되었다고 한다. 또 이 곳에 정성을 드리면 복을 받고, 소홀히 하거나 해를 입힌 사람은 재난을 당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이 부처의 명성과 효험은 대단해 이웃 마을 뿐 아니라 서울 등지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치성을 드렸다고 전해진다. 60년대 초에 태풍이 불어 부처를 모신 집이 모두 부서졌는데 이 마애불은 아무 손상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 부처 옆에서 자생하던 엄나무에서 뱀이 내려오기도 했는데 이 뱀을 마을 사람들이 잡아먹자 그 이듬해 방안에 뱀이 들어오는 등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 미륵 부처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어느날 돌이 굴러 내려와 미륵의 형상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싸리로 집을 세워 모셨다. 하지만 이 지역도 개발을 하게 되어 이 미륵불이 있는 곳도 벌목을 하게 되었는데, 벌목을 하기 전날, 벌목을 담당하는 봉재만이라는 사람의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부처님 주위에 있는 나무들은 자신이 표시를 해 놓을테니 베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가보니 과연 나무에 표시가 되어 있어 그 나무를 베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 나무를 엄나무라고 불렀다.

또 이 부처를 약사 부처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문안(성내)에 살던 가난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고양골 산에 가서 돌을 일으켜 보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사람이 꿈을 통해 계시받은 대로 돌을 일으켜보니 부처가 있었고 꿈대로 그 사람은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곳에 모여 살던 동래 정씨 중 정덕현 씨의 부친 정래환 씨가 자기 집을 기와로 짓기 전에 약사 부처집을 먼저 짓고 자기의 집을 나중에 지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초가였다는 것이다.

부청굴·부천굴·부촌곡 (富村谷)

현재의 화서동 위브하늘채 아파트(前에는 우람아파트)와 채석장이 있는 산 중간의 마을로서 화서2동 11통 330, 344번지 일대를 말한다. 부청골은 일명 부촌(富村)골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황씨 일족이 살던 부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가 도둑과 질병이 돌아 타 지역으로 이주했고 한때 논밭으로 변했으나 현재는 다시 주거 지역으로 변했다.

한편 주민들에 따르면 부청골에는 옛날에 미륵 부처가 있었으나, 이를 현재의 화양 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가 학교가 들어서면서 다시 고양골 뒷산자락 아래 으지로 향하는 길목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로 미뤄보면 이 마을의 지명 유래는 부처를 모신 마을, 즉 '부처골'에서 부천골→부청골→부촌골 등으로 음의 변화를 겪지 않았나 생각된다.

삼박골·산밭굴

이 곳은 으지에서 서낭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화서2동 3통 산곡짝에 있는 곳으로 260, 262번지 일대를 이르는 듯하다. 삼박골이란 뜻에 대해 주민들은 삼을 재배하는 골짜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이 인삼을 뜻하는지 대마를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산속에 있는 밭’이라고 해서 '산밭'이 '삼박'으로 변화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낭당 고개

서낭당 고개는 고양골 뒷산과 숙지산의 중간 골짜기를 통해 부청골로 넘어가는 언덕 마루에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임야 35-4번지에서 336번지로 넘어가는 곳으로, 현재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낭당 고개 아래에는 삼박골과 으지 등이 있는데, 주민들이 이 곳을 통해 으지와 부청골을 오고 갈 적에는 돌멩이 3개 씩을 던져 놓아야 아무 일이 없었다고 했다. 일부 주민들은 예전엔 길이 이 곳 밖에 없어 도적들과 왜적들도 이 길을 통해 마을을 침범했으므로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교통의 요지인 이 곳 언덕에 돌을 쌓아 놓고 적에게 대항했다고 한다.

으지

으지는 화서2동 3통 254, 255번지 일대에 있었다. 숙지산 북쪽 으지 골짜기에 밤나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에 오래전부터 '으지'라는 샘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이 없어져 연로한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지만 4계절 끊임없이 맑고 얼음처럼 시원한 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일제 시대에 으지 밑에 깊이 3~4m의 연못을 파고 연못 주위를 돌고 쌓아 놓은 뒤 물을 이용해 아래에 있는 논의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동래 정씨들이 이 곳에 살고 있었으나 무슨 문제가 생겨 현재의 고양골로 이주해 씨족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 근처에서 무슨 공사를 하게 되어 더 이상 연못 물을 끌어다 쓸 수 없게 되었고 샘과 그 아래에 있는 연못도 말라버렸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지금도 그 곳에 가보면 나무는 없고 잡초가 무성해 연못 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으지'한 지명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옛부터 마을의 오래되고 차가운 물이 항상 흘러내리는 샘터를 가리켜 차가운 샘물을 뜻하는 '으름물', '오름물', '오두물', '옻우물'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으지'란 지명도 혹시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하여 참고로 적는다.

해나무·회화나무

해나무는 회화나무를 잘못 부른 것인 듯하다. 이 나무는 화서2동 1통 고양골에 있는 것으로 병자호란 때부터 자생하고 있었다는데,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 가운데에 뚫린 큰 구멍속에서 황구렁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8.15해방 때, 6.25동란 때도 황구렁이가 나타나 나무 주변과 마을을 돌아다녔다고 전한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신성시하게 되었고 해마다 이 나무 밑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놓았고 떡도 해서 바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수원지명총람 (1999년 6월, 수원시 수원문화원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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