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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유래

  • 매교동은 현재 법정동인 매교동과 교동(校洞)을 포괄하는 행정동이다. 1914년 이전에는 수원군 남부면에 속하였다가, 1931년 이후 수원군 수원읍 남부정에 포 함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5일에는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수원이 시 로 승격되면서 새로 매교동과 교동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동통 합에 의하여 매교동과 교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매교동(梅橋洞)을 ‘매교동(梅校洞)’으로도 표기하기도 하지만, 1963년도 최 초 자료에도 매교동(梅橋洞) 표기되어 있고, 이후에도 한자 표기가 변경된 근거 가 없다. 따라서 ‘매교동(梅橋洞)’이라는 표기가 올바를 듯 싶다. 1998년 3월 31일 현재 동 전체 면적은 0.71㎢이며, 관할 법정동으로 매교동과 교동이 있다.

매교동

  • 1789년 수원 부의 읍치(邑治)가 옮겨오기 전 이 지역은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 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9월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 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 (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다. 이 때 남부의 산루동 지역이 현재의 매교동으로 추정된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경 때 산루동 대부 분의 지역은 상유천, 세동, 안용면 독산리 등과 함께 안용면 세리(細里)로 편제 되었다. 이후 1931년 4월 1일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을 때는 남부정 (南部 町)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 매교동(梅 橋洞)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1963년 1월 1일 동 통합에 의하여 교동과 함 께 매교동(梅橋洞) 관할이 되었으며, 1992년 8월 11일 수원시 조례 1816호에 의 하여 일부 지역이 세류동에 편입되었다. 매교동 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정조의 거둥길로 유명한 매교(梅橋)에서 유래 한 것이다. 즉 매교가 있는 지역이기 에 매교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원래 매교 의 처음 이름은 매산교(梅山橋)였는데, 1795년(정조 19) 거둥길이 이곳을 지나 게 되자 이름을 매교로 바꾸고 길 서편에 표석을 세웠다.

교동

  • 1789년 수원부의 읍치(邑治)가 옮겨오기 전 이 지역은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 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9월 수원부 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 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후,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나누었다. 이 때 남부의 14개 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동이라는 이름은 수원 향교를 178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후 붙여진 것이 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를 보면 ‘교동(校洞)’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 변 경 때 산루동 일부와 함께 산루리로 편제되어 수원면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31 년 4월 1일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을 때, 일본식 지명인 ‘궁정(宮町)’ 지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었을 때 교동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 동 통합에 의하여 매교동과 함께 매교 동 관할이 되었다. 1992년 10월 15일에는 수원시 조례 1824호에 의하여, 장안구 중동 일부가 교동으로 편입되었다. 교동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향교가 생기게 된 이후로 붙여진 것이다. 향교가 있는 마을 또는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의미에서 교동이라 불리던 것이 오늘날 까지 이어진 것이다.

도화동

  • 도화동은 교동에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기생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잘 파악되지 않았다.

동둔(東屯)

  • 동둔은 매교동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화성을 쌓을 때 화성의 사방 동·서· 남·북 네 군데에 못을 파고 군대가 주둔하였다. 화성 서쪽의 서둔에 대하여 동 쪽에 있으므로 동둔이라고 하였다.

수여선 철길

  • 지금의 매교동 공구 상가 골목은 여주와 수원을 잇는 수여선 철길이 지나던 곳 이었다. 매교동 135번지 일대를 말한다. 지금의 뉴코아 백화점 근처가 수여선역 중의 하나인 화성역이어서 지금도 그 곳을 화성역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수여선 철길은 1973년도까지 사용하였으며, 1977년에 도로를 만들면서 철거되었다.

수원시청거리

  • 1950년대, 1960년대에 수원시청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권선구 교동 74번지 수 원 문화원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원래 수원시청은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에서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팔달로 2가 남신 상회 일대에 있는 수원읍 사무소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1950년대에 무진 회사가 있었던 현재의 수원 문화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수원 문화원 바로 옆, 현재의 권선구청 자리에다가 청사를 새로이 지어 1959년부터 청사로 이용했었다. 현재의 수원시청은 팔달구 인계동 1111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1987년 이전한 것이다.

수원향교

  • 수원 향교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호로 수원시 교동 44번지에 있다. 수원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팔달문으로부터 서남쪽 약 1km 떨 어진 팔달산 남쪽 기슭에 있다. 수원 향교는 원래 1291년(고려 충렬왕 17)에 창건된 목재 한식 기와집으로 본 래의 위치는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였다. 1789년(정조 13) 신읍치로 이전 할 때 팔달산 남쪽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1795년 (정조 19)에 고쳐 지었다. 이 곳에는 공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에서 박세채에 이 르는 우리나라 성현 15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정조는 현륭원 참배길에 화 성에 오면 반드시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참배하였다. 대성전은 문묘(文廟)라 고도 부르며 지금도 봄, 가을에 제사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향을 피 우고 술을 올리고 있다. 향교 앞에는 하마비(下馬碑)와 나무로 만든 홍살문이 있 다. 하마비는 향교 앞에서 반드시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향교 에는 공자 및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향교에는 이 밖에도 명륜 당(明倫堂), 동무(東무), 서무(西무),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대성전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현재는 위로 유림 회관을 지어 앞의 여러 건물들과 함 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를 지급받아 이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곳에서 공부한 후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나간 경우가 많았다. 이 처럼 향교는 교육기관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갑오 개혁 이후 새로운 학 문의 등장으로 종전의 교육은 중지 되었다. 하지만 제향(祭享)은 오늘날까지 실 시되고 있다. 향교는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맡고 있 다. 매년 여름 방학 때면 학생들을 대상으로 충효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수원 향교는 남양 향교와 더불어 이 지방 최고의 유교 본산이다.

태장면고개

  • 태장면 고개는 도청에서 결혼 회관을 지나 시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 다. 예전에 이곳이 수원군 태장면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예전에는 이 일대가 모두 과수원이었으며, 고개 오른쪽에 화장터가 있었다. 화장터는 모두 임 광 아파트 옆쪽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팔달산 고인돌

  • 팔달산 남쪽 수원 시민 회관 윗쪽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4기의 고인돌이 모 여 있다. 교동 산 3-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이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며 영어로는 돌맨(Dolmen)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양편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하고 널찍 한 돌을 얹어 놓았고, 그 속에 사람의 시신을 묻고 동시에 토기나 석기 등의 부 장품도 함께 묻었다. 이를 거석분묘(巨石墳墓)라고 한다. 팔달산의 고인돌은 1호에서 4호까지로 명명되었다. 네 기의 고인돌 중 두 기 는 산의 완만한 구릉에 있고, 다른 두 기는 50m 떨어진 경사면에 있다. 2호 고인 돌은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당시 두 지역이 하나의 생활권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1, 2호 고인돌 주변에서 간돌검(마제 석검)이 한 점 발견되었는데, 안산시 선부동 고인돌에서 출토된 간돌검과 모양이나 깨어진 형태 가 비슷하여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으로 볼 때 안 산, 오산, 수원 지역이 모두 같은 장례 풍습을 지닌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짐작 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고인돌들은 경기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한강 유역의 고대 문 화를 알아보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둔동 여기산에서 선사 시대 사람들의 주거지 가 발굴되었다. 팔달산 고인돌과 같은 시대였고, 팔달산과 여기산의 거리가 4km 정도 되는 것으로 볼 때 두 지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팽나무 고개

  • 매교 다리를 건너 왼쪽 고개 길을 팽나무 고개라고 하였다. 그 곳에 보기 좋 은 팽나무와 정자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인계동과의 경계 지역인 매교동 13 통 일대를 말한다. 지금은 원래의 팽나무 대신 작은 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 팽 나무 고개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향교골

  • 이 곳은 수원 향교가 있어서 예전부터 향교골 또는 교촌이라고 하였다. 원래 향교는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으나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밑 지금의 위치 로 옮길 때 함께 옮겼다. 그리고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이라고 불렀다.

향교재·샘교재·행교재

  • 향교재는 수원 향교에서 매산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샘교재, 행 교재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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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매교동   Tel : 031-228-7644
최종업데이트 : 2018-10-05